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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November 10, 2010

[독점] 축구 때문에 요절한 '레게 원조' 밥 말리

사진=web.bobmarle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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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음악을 연주하지 않을 때, 밥 말리와 그의 패거리는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축구를 했다. 그런데 축구는 밥 말리를 죽음으로 몰아 넣다시피 했다.

Dan Davies 에디터 이민선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 호프가 56번지는 바로 밥 말리가 살던 집이다. 앞 마당에는 ‘레게의 전설’ 밥 말리의 수수한 조각상이 서 있는데 목에는 기타가 걸려 있고 한쪽 발은 흑백의 축구공 위에 올려져 있다. 바로 그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두 가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동상은 마치 자메이카의 풋살 코트를 연상하게 하는 콘크리트 마당 옆에 놓여 있다. 좀 더 좁고, 바닥이 고르지 못하며, 골대라고 해도 작은 벽돌을 양쪽에 쌓아 올린 게 전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새빨간 운동복을 입고 축구를 하는 밥 말리의 모습이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1973년 아일랜드 레코드사와 음반 계약을 맺은 이후 자리를 잡은 호프가에서 지낼 때나 투어를 할 때, 음악을 만들고 마리화나를 피우는 일 못지 않게 축구는 로버트 네스타 말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일과였다. 집 앞의 작은 마당에서는 자주 격렬한 축구 경기가 펼쳐졌다. 이곳에서 말리는 킹스턴의 빈민가인 트렌치타운에서 지내던 시절, 축구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했다. 이는 자메이카 섬 전체에 퍼져 있는, 집을 잃고 가난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메이카의 국기(國技)는 크리켓이지만 아이들은 마당이나 골목 또는 버려진 폐허만 있어도 공을 찰 수 있는 축구를 즐겼다.

밥 말리와 패거리들이 호프가에서 시간을 보낼 때, 축구를 잘 하거나 충분한 용기가 있는 이라면 누구든 그의 집을 찾아가 함께 축구를 즐길 수 있었다. 밥 말리 무리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또는 조언을 구하거나 돈을 빌리러, 그도 아니면 그저 대화를 즐기기 위해 꾸준히 그의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로 축구팀이 구성되기도 했다. 방문객들은 축구를 하며 밥 말리 주위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축구는 기술 그 자체입니다.” 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2년 전인 1979년 말리가 했던 말이다. “세계, 그리고 우주 그 자체죠. 기술이 뛰어나야 축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축구를 사랑합니다. 자유! 축구는 자유입니다.” 유년기를 보냈던 시골 마을 나인 마일즈와 이후 트렌치타운에서, 밀라는 공과 비슷한 물건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발로 찼다. 그는 덩치 큰 상대방을 농락하는, 빠른 발을 지닌 능숙한 선수였다. 어떤 이들은 만약 밥 말리가 음악을 만들겠다는 욕망이 없었다면 지역 리그 팀에서 뛸 수 있을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오늘날 밥 말리 박물관이 된 커다란 집을 찾은 방문객들은 밥 말리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2개의 방에는 1962년부터 시작된 밥 말리의 음악 활동에 대한 신문 기사로 방바닥부터 천장까지 온 벽이 도배돼 있다. 한쪽 방의 천장 한구석에는 1980년 크리스탈 팰리스 보울에서 열린 영국에서의 마지막 라이브 콘서트 일주일 전, 풀럼의 실내 경기장에서 영국 기자들과 축구를 하고 있는 밥 말리와 웨일러스(Wailers: 밥 말리가 이끌던 밴드) 멤버들의 모습이 실린 ‘레코드 미러’지의 기사가 붙어 있다.

:::생전에 축구를 즐겨하던 밥 말리:::

사 진 속의 밥 말리는 하늘 높이 뛰어 오른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이름을 날린 자메이카의 축구 스타 알란 콜이 마른 체격에 레게 머리를 한 모습으로 패스를 기다리고 있다. 알란 콜이 밥 말리를 처음 만난 것은 소년 시절이었다. “트렌치타운에 자주 놀러 갔었고 축구 실력 때문에 인기가 많은 편이었죠. 밥 말리를 만난 것도 그 때 쯤이었는데, 그는 환상적인 축구 선수였습니다.”

콜은 학교에서 뛰어난 축구 선수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후에 킹스턴의 팀인 산토스와 자메이카 대표팀에서 플레이메이커로 뛰며 주장 완장까지 차게 됐다. 이후 콜은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 축구 선수가 됐고 “자유분방한 라이프 스타일” 때문에 노티카에서 방출당하기 전 잠시 동안 브라질에서 뛰기도 했다. 자메이카 축구계에서 유일하게 두려운 존재였던 콜과 말리가 서로에게 끌린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콜은 “우린 매일 함께였습니다. 형제같이 살았죠”라고 회상했다. 말리 패거리에서 인기인이 된 콜은, 킹스턴의 집에서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투어까지도 따라다녔다. 1975년에는 말리와 그의 친구들이 킹스턴의 국립경 기장에 모여 4만 5,000명의 관중들과 함께 콜이 속해 있던 산토스가 펠레가 이끄는 뉴욕 코스모스를 무찌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다른 수많은 자메이카 사람처럼, 밥 말리는 브라질 축구 선수들을 숭배했으며 특히 펠레를 좋아했다. 어떤 사람들은 콜이 막 꽃을 피우고 있는 미국 축구 리그로 넘어가 뉴욕의 갈라티코 정책(스타들을 끌어 모으는 정책)에 동참하면 미국에서 점점 커가는 말리의 인기에 맞먹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밥 말리의 전기인 ‘불꽃을 쥐다(Catch a Fire)’를 집필한 티모티 화이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친선 경기 중 거친 대접을 받은 펠레가 화를 냈다고 한다. 또한 이후 뉴욕 코스모스가 콜의 영입을 거부하자 밥 말리 패거리는 “놀라운 팀인 산토스의 주장을 거부하다니, 바보 얼간이 집다”이라면 반발했다고 한다.

추위에 맞서다
말리가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던 때는 웨일러스 초창기 멤버들이 낸 첫 앨범을 들고 ‘캐치 어 파이어(Catch a Fir)’ 콘서트 투어를 하던 1973년이었다. 사진작가 데스몬드 모리스는 당시 그다지 유명하지 않던 밥 말리 일행을 따라 함께 짧고 행복하지 못했던 콘서트 투어를 쫓아다녔다. 모리스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어느 날 아침, 밥 말리 패거리는 축구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그들은 한번도 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라는 하늘의 계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1977년에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1975년에 런던 문화 회관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가진 뒤, 밥 말리와 웨일러스는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탔고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은 런던에서 14개월 동안 머물며 최고의 앨범으로 평가 받는 주장의 앨범 ‘엑소더스(Exodus)’와 ‘카야(Kaya)’를 제작한다. 또한 녹음이 없을 때는 웜우드 스크럽스와 배터시 파크에서 공을 차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web.bobmarle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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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시 파크에서 밥 말리와 공을 찼던 롭 패트리지는 당시의 인연으로 1977년 여름 아일랜드 레코드사에서 영국 언론 담당으로 일하게 됐다, 그가 처음으로 맡았던 일은 아일랜드 레코드사와 올 코머스사 간의 친선 경기에 밥 말리와 웨일러스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을 소집하는 메모를 보내는 일이었다.

패트리지는 “밥 말리를 따라다녔던 콜은 축구 경기에 재미를 더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웨일러스는 자신들만의 재미있는 방식으로 축구를 했어요. 45분 경기 후 휴식의 개념도 다소 애매했는데, ‘마리화나 타임’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밥 말리와 패거리들은 경기 시작 전에도 마리화나를 피웠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마리화나를 피운 후 축구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아일랜드 레코드사의 영국 지부에서 일하는 트레버 와이어트는 밥 말리를 힘이 센 축구 선수로 기억하고 있다. “밥 말리의 공을 뺏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공은 항상 밥 말리에게 갔어요. 그는 미드필더로 뛰었고 밥 말리의 패거리는 그를 주장으로 불렀습니다. 축구를 너무 잘해서, 마치 브라질 선수와 뛰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죠.”

그러나 1978년에 성공적이었던 ‘엑소더스(Exodus)’ 앨범 투어를 위해 브라질로 가면서 밥 말리와 일행의 축구 실력은 엄격한 평가를 받게 됐다. 1970년대 브라질 대표팀의 선수이자 1974년 월드컵에 출전했던 파올로 세자르는 히우 지 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한 밥 말리 일행의 모습을 TV로 지켜본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밥 말리는 브라질 축구를 좋아했고 저의 팬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친선 경기 일정이 잡혔고, 세자를 포함한 전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과 자메이카 손님들은 히우 지 자네이루에 있는 축구장에서 시합을 갖게 됐다. 이날 경기에서 밥 말리는 펠레가 입었던 산투스 유니폼을 입고 나왔는데, 당시 사진작가 모리시오 발라다레스의 기억에 따르면 그 유니폼은 밥 말리에게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경기 시간은 짧았어요. 경기가 빨리 진행돼서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끔찍한 경기였거든요. 밥 말리는 정말로 못했어요. 축구 자체를 하지 못했죠. 저라면 10점 만점에 1.5점을 주겠습니다.”

흥분이 가라앉다
패트리지는 말리를 웨일러스 멤버들의 보호를 받았던, 재치 있는 선수로 기억한다. “밥 말리에게 양발로 태클을 걸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밝은 피부와 (말리의 아버지인 노버트 말리는 리버풀 출신의 백인 군인이었다.) 작은 체격으로 인해 놀림을 받으면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말리의 별명은 ‘터프 공(Tuff Gong: 터프한 징)’이었다. 말리는 축구 선수로도 성질이 대단했다. “축구를 사랑하기 전에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말리가 회상했다. “축구를 먼저 사랑하게 됐다면 좀 위험한 일이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축구는 매우 폭력적이니까요. 누군가에게 거친 태클을 당했을 때는 전쟁 중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사진=web.bobmarle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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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말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은 1975년에 말리를 처음 만났던 작가 제프리 필립이다. 그는 킹스턴의 모나 헤이츠 공원에서 말리와 함께 수많은 축구 경기를 뛰었다. ‘질리’, 웨일러스에서 타악기 연주를 맡았던 앨빈 ‘시코’ 패터슨, 그리고 말리의 앨범 자켓의 대부분을 디자인했던 네빌 게릭은 밥 말리의 축구팀에 빠지지 않고 동참했다.

1979년 12월 필립은 “공 좀 차자”는 ‘시코’의 초청을 받고 호프가에 갔다. 크게 울려 퍼지는 ‘서바이버(Survivor)’ 앨범의 음악을 배경으로 3인조 경기가 펼쳐졌다. “첫 경기에서 밥과 질리의 팀을 6-3으로 이겼어요”라고 필립이 말했다. “시코는 밥에게 다른 사람들도 경기를 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했지만 밥은 자신의 집이니 경기에서 빠지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두 번째 경기가 계속됐죠. 그리고 거기서 불같이 화를 내는 밥을 본 거예요. 속이는 기술을 사용하며 그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내자 밥 말리는 저를 넘어뜨렸어요. 힘들이지 않고 저를 때려 눕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는 밥 말리에게 맞섰습니다. 다행히 시코가 끼어들어 말렸지만 콘크리트 블록을 갖고 시코를 쳤어요. 그러나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경기를 재개했습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2-6으로 졌죠.”

호프가에서 축구 경기를 했던 것은 패트리지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축구협회가 정한 축구규칙을 준수하거나 11명의 팀으로는 절대 축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브라질 해변에서 하는 축구 같았죠. 밥 말리가 집에 있는 날이면 매일 축구 경기가 펼쳐졌고 아무나 같이 끼어서 축구를 즐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콜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경기에 참여하려면 충분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1977년 말리는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악성 종양이 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혹자는 말리가 킹스턴에서 축구를 하면서 당한 부상 때문에 암이 생겼다고 말한다. 누구의 말을 믿든 간에 1977년 배터시 파크에서 열린 경기 중 대니 베이커에세 당한 서툰 태클이나, 파리에서 가진 경기 도중 프랑스 기자의 축구화에 밟힌 일로 문제가 악화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유전적인 문제이든, 뜻하지 않은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데서 온 문제든, 발가락이 너무 심하게 썩어 들어가자 프랑스의 의사는 말리에게 발가락을 절단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리는 미국 투오에 차질이 생길까봐 의사의 제안을 거저했다.

말리의 동료인 클로디 마솝과 결혼한 시도니 윌리엄슨은 “그의 발을 걱정했었죠”라고 털어 놓았다. “말리는 발가락에 밴드를 감고 흐느적거리면 걸어 다녔고, 기다랗게 발톱이 자라 전혀 건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리에 있는 의사를 만나보라고 말리에게 권한 사람은 웨일러스의 기타리스트인 주니어 마빈이었다. “말리는 파리에서 축구를 계속 하고 싶어했는데, 경기 중 프랑스 기자가 그의 발을 밟아 축구화 징이 말리의 발가락을 관통하고 말았어요.”

건강이 계속 악화됐지만, 호프가에 있는 집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이 보여주듯 말리는 런던에 돌아가서도 축구와 공연을 계속했다. “그때가 아마 말리와 가장 친해졌을 때였을 거예요”라고 패트리지가 털어놓았다. “보통 제가 하는 일은 밥이 원하지 않던 일을 물어보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1980년이 되자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게 됐고, 저는 그 때 말리에게 TV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말해줬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가 축구를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는 어느 날 오후, 크레이븐 코티지(풀럼의 경기장) 옆에 위치한 에터니트 와프라는 실내 축구장을 발렸습니다. 첫 번째 경기는 에디 그랜트와 아이스 레코드사 동료들을 상대로 했어요. 시간이 충분한 줄 알고 2시간만 경기장을 빌렸는데 거의 2시간이 다 지난 후에야 경기가 시작됐고, 결국에는 다음 두 팀을 위해 각각 100파운드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레코드 미러’지가 현장을 취재하러 왔고, 저는 웨일러스 팀에서 5분간 골키퍼를 봤습니다. 그런데 5분 만에 4골을 허용해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죠. 그리고 결국에는 경기장을 일주일 동안 빌리기로 했습니다.”

사진=web.bobmarle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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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영국 축구장의 ‘캐주얼’ 패션이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밥 말리는 그 유행을 먼저 선보인 사람이었다. 밥 말리는 축구장에서 츄리닝과 운동화 패션을 선보였는데, 괜히 어린 아이들이 사 입지 못하는 비싼 옷을 입어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기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말리가 항상 자기 옷만 사 입은 것은 아니었다. 패트리지는 에터니트 와프에서 경기를 치르기 전, 웨일러스가 풀럼 팰러스 가에 위치한 스포츠 가게에서 실내 축구에 필요한 신발과 운동복, 티셔츠 등의 물건들을 잔뜩 사들고 밥 말리 앞으로 엄청난 액수의 계산서를 남겨 놓은 채 경기를 치르러 갔다고 기억했다.

웃어요, 자메이카
1980년 말이 되자 암은 밥 말리의 몸 전체로 퍼졌고, 결국 그는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하던 중 쓰러졌다. 콘서트 투어는 취소됐고, 암을 물리치려는 마지막 시도로 밥 말리는 독일에 가서 암 전문의인 요세프 이셀스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 동안 제가 했던 일은 밥 말리를 위해 ‘매치 오브 더 데이’(영국 BBC에서 방송하는 프리미어리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를 녹화하는 거였죠”라고 패트리지는 회상했다. ‘녹화 비디오를 토트넘 홋스퍼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1978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 대표팀과 토트넘에서 활약했던 미드필더) 유니폼과 함께 보냈습니다. 1978년 월드컵을 본 뒤 밥 말리는 아르딜레스 팬이 됐어요. ‘탑 오프 더 팝스’(영국 BBC의 대중 음악 차트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녹화 도중 쉬는 시간에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던 밥 말리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밥 말리는 브라질 축구 팬이었지만 앙숙인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아르딜레스에게 빠졌어요. 밥 말리가 토트넘 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죽을 때까지 아르딜레스의 팬이었던 건 확실합니다.”

밥 말리는 1981년 5월, 호프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마이애미에 들렀다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호프가에 위치한 작은 조각상과 비슷하게, 킹스턴의 국립 경기장에는 전세계에 레게를 수출했던 남자의 동상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이 경기장은 밥 말리가 1978년 열린 평화 콘서트 중 격렬하게 대치하던 자메이카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을 무대로 불러 함께 손을 잡으며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자메이카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멕시코와 비기며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었던 무대이기도 하다.

윔블던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1998년 월드컵 본선에서 자메이카의 역사적인 골을 넣었던 자메이카의 축구 영웅 로비 얼은, 밥 말리의 정신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되살아났던 1997년 11월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자메이카에서 가장 축구를 사랑하는 유명인이자, 자메이카인에게 자부심과 존경심을 심어주며 진정으로 나라를 하나로 묶었던 남자가 죽은 지 16년하고 반년 후, ‘레게 보이즈’로 알려진 자메이카 대표팀은 멕시코와의 경기가 있던 날 아침 8시 30분, 밥 말리의 노래 ‘원 러브(One Love)’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얼은 “아마도 자메이카에서 마지막으로 찬양을 받은 사람은 밥 말리일 것입니다”라며 모든 반목이 사라졌던 그날에 대해 설명했다. “밥 말리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도록 경기장으로 가는 도중, 그의 동상을 지나쳤던 건 딱 어울리는 일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자메이카로 이끌었습니다.”

http://www.sportalkorea.com/newsplus/view_sub.php?gisa_uniq=20101110111604&key=&field=&section_code=9014&search_ke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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