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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26, 2011

일본의 소가강의 원래 이름은 백제강이다.


 『부상략기』(扶桑略記, 12세기 초경의 옹조 불교사)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에 기술된 비다쓰 천황의 행적이다. 이 통사에 "비다쓰 천황이 즉위한 뒤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고 밝혀져 있다. 역대 일본 천황 가운데 왕도에 '백제궁'이라고 부르는 왕궁을 지은 사람은 비다쓰 천황이 최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였던 정복왕 오우진(應神, 4세기 말경) 천황 이래 15대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왜나라에 최초의 백제왕궁이 당당하게 선 것이었다.

비 다쓰 천황이 백제왕궁을 지었던 나라땅 야마토의 대정(大井)은 백제인 왕족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던 지역이다. 그런 유서 깊은 곳에 백제인 왕족인 비다쓰 천황은 그의 궁궐인 백제 왕궁을 떳떳하게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나타나 있다.

즉 "비다쓰 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에 궁을 지었다"고 밝혀져 있다.
스 이코 천황의 남편인 비다쓰 천황만 백제왕궁을 지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또 다른 백제인 천황도 백제왕궁을 지었다. 바로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인 죠메이 천황이다. 『일본서기』는 "죠메이 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고 자세하게 전한다. 14세기 초의 『부상략기』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중요한 사실은 『일본서기』에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인 죠메이 천황은 백제강 강변에다 백제궁을 짓고,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구중탑(九重塔)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점이다. 즉 백제인인 죠메이 천황이 나라 지방 백제강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 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인의 식민지요 백제왕부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 옛날의 '백제강'은 오늘날 '소가강'(曾我川)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 백제강의 명칭이 이렇게 바뀐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로 알려져 있다. 이때 일본 전역에서 한국과 관련된 각종 명칭이 대부분 바뀌어 버렸다.


일 왕족 무령왕릉 참배 [한겨레 2004-08-05 19:28]  아 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61)씨가 충남 공주시의 백제 무령왕릉을 참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공주시는 5일 “아사카노미야씨가 지난 3일 수행원과 친척 등 2명과 함께 무령왕릉 안에서 술과 떡, 과자, 향(심향목) 등을 차려놓고 일본 왕실의 전통예법으로 절을 하는 등 참배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석호(77) 전 부여문화원장의 안내를 받아 무령왕릉을 자세히 둘러보고 갖고 온 향로와 향을 공주시에 기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면 무령왕릉을 관찰한 내용을 일왕에게 자세히 보고하겠다”며 “기증하는 향로와 향을 박물관이나 무령왕릉 등에 전시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의 무령왕릉 참배는 아키히토 천황이 지난 2001년 말 “무령왕의 손녀 디카노니히가사가 일본 초대 왕인 진무 천왕을 낳았기 때문에 나는 백제 피를 받았다”고 언급해 파문을 일으킨 이후 왕족으로는 첫 번째다. 일 본 왕실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심향목은 1300년 이상된 향나무 뿌리로 만들며 태우면 연기 대신 그윽한 향내가 난다. 아사카노미야씨를 안내한 이 전 부여문화원장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의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며 “이들의 무령왕릉 방문은 일본내 여론을 의식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공주/손규성 기자

천 지천황 2년(A.D 663년) 9월 정사(7일) 백제의 주유성이 마침내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때에 국인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다만 대례성(일명 저례성)에 가서 일본의 장군들과 만나 사건의 기밀한 바를 의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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