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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rch 21, 2013

경상도 강원도 지방의 주구묘는 마한과 야요이시대의 주구묘가 아니다.

 2010.04.01. 18:22

그리운길님의 댓글을 보고...  중요한 사항이라 답글을 올린다기 보다 기본적인 사항을 혼동하는듯 보이는데
  댓글로 처리하기에는 3개이상이 될듯하여    답글로 대신합니다. 

    편의상 님의 댓글을 올리니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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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하지만 님의 글 속엔 주요한 것이 빠져 있군요...주구묘와 전방후원분의 관계입니다....어느 분은 주구묘(영광 군동리 고분 시기 추측연대)를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라고 하고..님이 주장하는 왜계 백제관료설을 부정하는 주요요인의 하나이기도 하거니와.
무녕왕때 기문 대사를 백제가 공취했는데..동성왕과 관련된 왜(열도) 무사 500인과 영산강 지역에서 왜계백제관료설을 주장하는 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댓글 달다보니 한반도 왜의 중심이동설 (가야에서 영산강유역으로) 이 생각나는군요.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은 가야사의 발전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도 참고 하셨으면 좋죠
10.03.31 01:27 new
전방후원분의 묘제가 어느시기에 갑자기 뚝 떨어졌다..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이 따릅니다...분면 전방후원분 같은 묘제는 그 전신 묘제가 있을 수 밖에 없죠..
님뿐만 아니라 전방후원분에 대해서 주장하시는 분들의 아쉬움은 그러한거겠죠..
어느날 갑자기 전방후원분의 묘제가 생겨났다 이런씩의 해석을 할뿐만 아니라 가장 안타까운 점은 한반도의 주구묘는 관심을 뒤로한채 일본의 주구묘와 전방후원분의 연관관계를 얘기 한다는 거겠죠. 10.03.31 01:40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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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그리운길님의 댓글에서 주장하고 싶어 하시는 바는  아마도

   1. 영광군동리 주구묘가 일본의 야요이시대에 보이는 주구묘에 뒤지지 않는 편년을 보이므로  일본측에서  전방후원분의 연원을 주구묘에서 찾듯이  한국의 전방후원분도  한국의 주구묘에서 계통적으로 연결되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의구심에서
  저에게 영광 군동리유적의 편년을 찾아 보라는 언급을 한것 같군요

   2. 위1번과 같은 언급을 하면서  한국의 주구묘를 언급하지 않고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의 연원을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계통을 찾는다는 점을 아쉬워 하시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그리운길님의 인식은  인터넷상에 떠도는 < 주구묘는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다>라는 글에서 착안된것 같은데, 이부분에 대하여 그리운길님의 인식상의  착오인점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주구묘는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다>라는 글따위는  개인적으로  오류투성이로 가치없는 글로 판단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하여 올린  사진< 마산진동 청동기시대의 봉토묘>라는 것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은 맞지만 봉토묘가 아니라  지석묘의 개석을 들어낸후  매장주체부인 하부구조의 노출상태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물론  발굴기관인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측에서   이 지석묘하부구조를 설명하는 문구에 봉토를 원형으로 즙석을 둘렀고 주구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지석묘의 하부구조를 봉토묘로 규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에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판단합니다. 똔 춘천 천전리유적도  우리가 알고있는  초기삼국시대의 주구묘가 아니라 청동기시대유적으로 발굴자인 강원문화재연구소측은 이를 구분하기 위해 주구부 석관묘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왠 전방후원분의 전신인 주구묘의 연원을 청동기시대에 찾고 있는지..  그저 용어상의 유사성으로 가져다 붙여버린것으로 볼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근거자료로 제시한 사진들이  기본적으로 봉토와 분구의 개념분리도 안된 상태에서  광고에서 나오는 카피처럼 < 글로서 키스를 배웠어>라는 말처럼 도면이나 사진에 대한 정확한 인식없이  몇몇 자료를  짜집기하는데서 야기된  오류이자 착오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1.  주구묘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의 상관관계를 언급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요!!!


   우선 주구묘와 분구묘의 개념분리가 필요할듯합니다.  최완규선생이나 임영진선생은  분구묘란 개념이 주구묘를 포함하는 더큰 카테고리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고고학 연구자들이 실제 발굴보고등에서 대체적인 용어 사용 예를 볼때,  늦은시기의 주구형태를 가진것들은 발굴과정에서 정확히 분구를 확인할수 있는등 이를 분구묘라 하고  주구묘는 초기삼국시대(원삼국시기)에 해당하는 것들을 주구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주구묘는 이른시기의 무덤으로  주구는 확인되나 명확히 분구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분구묘에 비해 비교적 작은형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나 명확히 학문상 용어로 정리되어졌다고 보기는 아직은 어려워 보이나 몇몇 견해들이 힘을 얻어 가는 상태라 판단합니다.  


   A. 그리운길님이 언급한 영광군동리 고분 양식인 주구묘(광주신창동유적과 유사한 흑색마연토기등 출토유물로 신창동유적과 동시기로 파악됩니다.)는  서산부장리, 전북완주등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김포 양촌 , 용인 상갈, 오산 수청등지에서도 확인되며,  경주덕천리유적등 영남지역에서 확인됩니다.   거의 전국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4-5세기대까지  이어지며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대형화되어 분구묘로 이어지는(피장자가 최고위급 지역수장의 무덤: 서산 부장리-백제계 금동관묘출토)  서산 부장리, 기지리 및 전북 완주와 같은  유적으로 볼때,  그 유적의 규모(분묘의 수)나 유구의 규모(무덤의 크기), 그리고 4-5세기때까지 고분 문화의 전통을 잊고 있는 점등으로 볼때  주구묘 분구묘의 중심지역은   충남 전북지역으로 파악됩니다.

   B.위 A번과 같은  주구묘 분구묘의 유적양상을 분석하여  최완규선생은  비교적 조심스럽게  이와 같은 묘제가 마한의 묘제가 아닌가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최완규선생은 익산 율촌리유적을 근거로  , 주구묘의 평면적인 상태에서  분명한 분구의 흔적 분구의 높이가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분구묘로 이행되어 나갔다는 견해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 그리운길님의 인식상의 오류가 무엇인지 위  분구묘 주구묘에 대한 설명을 통해 확인할수 있습니다.

   A. 영광 군동리 주구묘가 이른시기의 주구묘이기에 연대를 확인하여 주구묘가 일본의 독창적인것이 아니라는  인식까지는 크게 문제될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산 부장리와 같이 5세기대에 해당하는  분구묘의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 는  일본에서는  고분시대로 접어 들어 한창 전방후원분을 만들어 지고  있던 시기에,   한국  아니  주구묘 분구묘의 중심지역인  충청, 전라지역에서는  5세기대까지  전방후원분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한변의 길이가 20-40미터정도의 방형 분구묘(서산 부장리)에  매장주체부는  석실분이이 아니 기존의 목곽을 사용하는 형태의 분구묘로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운길님이 이러한 부분을 설명할수 있어야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과 주구묘 분구묘의 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생겨난다고 판단하는데 그리운길님은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다시말해서, 주구묘 분구묘는  지역에 따라 시대적인 편차는 존재하나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으로  대체되어 나가  전방후원분으로 계통적으로 전개된 양상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B.  복암리3호분의 경우  최고도로  진화된 분구묘라 할수 있는데 아파트형 고분이라는 말처럼,  매장주체부는 이전시기의 분구묘가 목곽이었던 반면에  옹관->  왜계 횡혈식 석실분(3호분 96년석실의 경우 피장자의 관을 옹관임)->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으로 변천되어 간것으로 판단되는데   이와 같은 복암리 3호분은  대표적인 영산강유역의  복합제형(분구)묘입니다.

    특히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은   3호분 5호석실의 경우 1) 석실축조에 있어 사비기에서 주로 보이는 판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2) 금동이식  은제대금구 은제관식이 출토되었는데 은제대금구는  그 형태나 혁대를 고정하는 판상금구의 모양등으로 보아 사리함 명문으로 유명한 부여 능산리사지 목탑지에서 나온  은제 대금구와  유사합니다.(김낙중)

   이상과 같은 복암리 3호분은 옹관을 거쳐 왜계 횡혈식 석실분 백제계석실분등 누대에 걸쳐 조영된  거대고분 즉 고총인데 전방후원분이 아니라 기존 고분문화를 계통적으로 이어간 복합제형분(김낙중)이라는 점에서  분구묘의  고분문화는 6세기중후반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 역시,  그리운길님이 언급한  한국에서 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전방후원분도 형식학적으로 분구묘의 일종이나.  그 계통적 연원에 있어  충남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방형 장방형 주구묘, 분구묘에서 전개된  제형 분구묘와  일본에서 계기적으로 발달한 전방후원분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제형분구묘인  복암리3호분과  전방후원분인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형분구묘는 복암리 3호분 뿐만 아니라 함평 만가촌 13호분, 영암 만수리 4호분, 내동리 초분골 1,2호분, 나주 신촌리 6호분, 영암 신연리 9호분 나주 용호리등   전남 영산강일대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의 고분문화 전개양상과 달랐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전방후원분이 아닌   복합제형분의 존재에 대하여  그리운길님이  납득할만한 설명이 있어야  주구묘, 분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계기적으로 고분문화가 전개된것이 아닐까라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C. 마지막으로 주구묘에 대한 그리운길님의 언급에서 <어느 분은 주구묘(영광 군동리 고분 시기 추측연대)를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라고 하고..님이 주장하는 왜계 백제관료설을 부정하는 주요요인의 하나이기도 하거니와.>라는  말씀하셨는데  그 어느분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하군요. 어떤 고고학 연구자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재지수장설을 주장하며 복암리3호분을 발굴하며 영산강유역의 고분문화를 정리 학위논고를 제출한 김낙중선생도  위에서 제시한 복합제형분과 전용옹관의 등장으로  유력 재지수장의 존재를 주장하고(복암리집단).  영산강유역  최고 수장의 영향력에서 약간 벗어나 비교적 변경에 해당하는 복합제형분의 피장자인 군소수장이  구주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전방후원분을 채택한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과연  영광군동리 주구묘를 근거로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과의 연과성을 들어 왜계 백제관료설을 부인하는지  ...과연 그런 연구자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설마  그 어느분이  <주구묘는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다>라는 식의 인터넷상의 무분별한 편집 짜집기식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2. 동성왕대  구주의 공축국 무사 500인과 관련  왜계 백제관료에 대한 문헌적 근거

   잘아다시피  5세기말-6세기초는 동성왕대와 무녕왕시대에 해당합니다.  이시기는 한성백제붕괴후  다시 힘을 추수려 나가 마침내  중국남조에 다시강국이 되었다는 국서를 보낸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시기 삼국사기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나  일본서기에서는 면모가 확인되는 왜계 백제관료들은  계체기부터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운길님이 언급한 임나사현할양기사는 지적한 것과 같이  계체 6년 (512) 무녕왕 12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면  동성왕이 왜에서 돌와와 즉위한 시기는 479년입니다. 바로 이때 공축국 무사500인으로 부터 호위를 받아 귀국하여 왕위에 오릅니다.  동성왕 20년에는 무진주에 친정을 하기도 합니다.
   동성왕의 귀국및 왕위계승에 관한 기사는  한성백제 붕괴후  왜의 군사들이 한반도로 건너오게되는 첫번째 사례이며 그 이유까지 알려주는 문헌자료입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귀국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도 있다고 판단합니다.(박천수)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5세기 말 6세기 초반이라는 시간적 공간, 그리고  공간적인 공간인  영산강유역에 나타나는 구주계 고분문화간의 연관성을 애써 외면 무시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또한 동성왕 사후 불과 6년후 왕위에 오른 계체왜왕시기에   

1). 임나사현의 할양기사(,계체 6년 512년: 무녕왕12년) 
2)다사진(대사)관련기사(개체7년 :백제가 교역로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다사진을 가지겠다는 내용) ,
   #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식 표현대로 조공국인 백제가  건방지게도 <가야의 다사진을 신이 조공하는  津路로 하겠다: 以加羅多沙津  爲臣朝貢津路>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공국으로 백제를 수사하였으나 건방진 조공국?이 마음대로 다사진을 가지겠다 (以--, 爲 --)는 식의 내용마저 바꾸지 못한듯 보입니다.
3)다사진 관련 기사( 개체23년 529년 성왕7년 :가야측이  왜조정에 항의함에도 불구하고 < 부여에 주었다>는 기사와 같이 가야측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신라와 통혼하는 내용)등

   일련의 사건에    왜계 백제관료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즉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의 계통이 구주계라는 고고학적인 근거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서도  백제가 임나사현을 차지하고 곧바로 기문 ,대사지역으로 진출하여 황강, 남강수계, 섬진강수계를 통해 대외교통로를 확보하며 더욱 성장하였던 대가야세력을 축출하고   영산강유역 확보와 더불어 대외교통로도 장악하는 일련의 과정에 왜계 백제관료가 활약하였음을 확인할수 있습니다.(박천수) 

   5세기 말 -6세기초반에  걸친  한성백제붕괴기후  부흥에 몸부림치던 백제가 국운을 걸고(동성왕의 친정) 힘을 회복해 나가던 시기인 동성왕대부터 무녕왕대에 걸친  백제의 노력의 산물이  영산강유역의 장악으로 나타나 결국 帶沙까지 얻어 해남과 같은 중국남조로의 교통요지 뿐만아니라  대倭교통로 확보하여  국력을 회복할수 있었던 것이라 판단하며  한성백제붕괴후 힘의 부재상태에서  왜계 백제관료와같은  왜의 용병이 활약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박천수)  부연하면  일시적인 전쟁을 통해 이지역을 장악한것이 아니라  한세대 이상의 크고 작은 대가야 투쟁을 통해서 얻은 결과라 판단합니다.


 3.   가야 지역에서 보이는 왜계 문화(박천수선생의 견해)

  그리운길님이 언급한 한반도 왜의 중심이동설과 같은  엉뚱한 애기는 본인의 견해가 아니라면 또는 그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구 태여 언급하는것은  좋은 예의로 보기 어렵군요. 본인이 생각난다고 하여  한반도 왜 중심이동설같은  엉뚱한 애기를  툭 던져놓는 것은 좋게 보기 어렵습니다. 혹여  그리운길님이 그런 견해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명확히 하여 언급한다면  예의 운운할 이유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가야지역에서 나타나는 왜의 문화요소는  5세기말-6세기초반에 국한되지 않으나, 백제-대가야간  기문대사를 놓고 쟁투를 벌여던  5세기말 -6세기초반에 국한시켜  가야에 보이는 왜계 문화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어  이로서 그리운길님의 한반도왜라는 애기에 대하여  간략한 답변으로 갈음하겠습니다.


   6세기 초반 등장하는 경남서부지역에 나타나는 즉 가야지역에 나타나는 왜계 고분으로는  고성 송학동1호분, 의령 경산리 1호분,  의령 운곡리 1호, 사천군 선진리고분, 거제시 장목고분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분에서는
  1)적색안료를 석실내부에 도색한것, 석실구조에서는 문주석, 문지방석이라는 왜계 석실의 특징이  뚜렷이  보이고 있으며,
 2)하니와를 모방한 원통형토기와 함께  경산리ㅣ호분 의 주변 중소형 석곽묘에서도 대도 철모 철촉등 다량의 무기의 부장이 확인되는등  일본산 갑주와 대도 철모등 무기류매납이  많아  무사 혹은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할수 있다.


   이러한 유구및 유물들의 양상을 살펴보면 , 이식되어 들어온 왜계 고분문화양상을 뚜렷이 보 이는 한편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의 출현과정과 같이 고령지역에서 남강수계를 거쳐 고성만 사천만에 이르는  남해안으로의  교통로상 요지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가야가 섬진강유역의 기문, 대사지역을  백제에 빼앗기고 나서  남해안지역에 새로운 교통로를 확보하는데  대가야의 용병으로   대가야의 대외교류와 동시에 백제에 대항하는 방어전에 종사한것으로 파악됩니다.

  이처럼 5세기말 6세기초반에 왜계고분이 대가야의 영향력하에 있는 지역에 출현하는 것은   영산강유역에 전방후원분과 같이 군사적목적을 전제로한 왜계백제관료처럼  기문대사지역을  빼앗긴 대가야에 의해 용병의 성격으로 종사한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들은 영산강유역과 같이 구주지역에 출자를 두고 있으나, 영산강유역은 구주 북부의 유명해 연안지역으로 판단하고,  대가야지역에 나타나는 왜계 고분의 피장자는 화가산현 대곡고분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화가산현지역에서는 대가야산 문물인 이시기에 집중되고 있음을 들어    대가야지역에 존재하는 왜계고분의 피장자의 관계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출자지역를 달리하는 왜계 무사집단이 백제와 대가야에 각각 종사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저의 개인적 견해로는 대가야의 경우, 대가야에 에 종사한 무사집단에 대한 댓가로   대가야는   각종 마구  마갑이나 f자형판비 검릉형행협등  기마관련 철제문물이 집중된 반면에  백제의 경우에는  대가야가 제공하는 철제 기마관련 문물 보다 선진문물인  국가체제를 발전시켜나갈수 있는 고등문물  예컨대 한문, 불교및  율령?과 같은 고등문물을 전달한것으로 판단됩니다. 



   첨언 :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반에 백제왕위에 있엇던  동성왕 무녕왕 모두  왕위계승권자로서 왜로부터 귀국후  왕위에 오르고 있는데  이를 마치  강성한 왜에   대하여 약소국 백제가  이들을 볼모나 인질로 보낸것이 아닌가라는 연상을  하는 견해들이 일부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략당시에 위기에 처한상황에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는 점을 놓고 보면, 동성왕과 무녕왕이 왜에 체류하다가 귀국후 왕위에 올랐는지 어느정도 유추할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즉  나제동맹성립후 개로왕은 국난시 문주를 신라에 파견 구원을 요청하나  동성왕때는 통혼을 통하여 대고구려전에 있어 양국간 군사적   원할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한성백제의 붕괴로 이어진 국난상태의 백제에 있어 신라에 이어 또하나의 이용대상은  <왜>로 보이는데    왜에 왕위계승자를 보내어 상당시간 체류한것으로 보여지는 바  신라와 같이 공동의 적에 대하여 원할이 동맹관계로 군사적 협력이 이루어졌던것과 달리 바다건너 왜의 군사적 도움을 얻는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것으로 파악됩니다.    국난상태의  웅진기 백제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족중 상위자인 왕위계승권자를 보내어  선진문물의 전달을 매개로한 군사적지원을 이끌어 내기위해 노력한것으로 판단합니다.  결론적으로  동성왕이나 무녕왕은  인질이나 볼모가 아니라  군사적지원을 이끌어 내기위한 최고위급 사절단대표이었고  바다건너있는  왜로부터 원할한 군사적지원과 교류를 위하여 상당기간 체류한것이라 추론합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항은  개로왕이  신라에 제일 왕위게승권자인 문주왕을  신라에 보냈다는 점이고 두번째인   곤지를 왜에 보냈다는 점입니다.
그리운길 10.04.03. 14:09
글쎄요..당분간 글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으나..글을 올리게 되네요..일제시대때의 일본학자들이 전방후원분의 전신이 주구묘 라고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던 터에 그 기원이 인터넷이었다니..알려주셔서 감사하구요......인터넷 -- 일제시대의 일본학자들 -- HD 역사스페셜 ...음,,재밌군요.2000년 이후의 논문중에서 그러한 주장들을 부정하는 논문을 못 본것 같은데 .... 님과 같이 이러한 식으로 누가 무슨말을 했다기 보다는 전체 논문을 올려주셨으면 합니다...맘에 드는 팩트의 짜깁기 라는 생각만 드는 건 왜 일까요...관리의 무덤을 왕, 천황의 묘제와 동급으로 한다...참.ㅜ.ㅜ
그리운길 10.04.03. 14:24
한반도의 왜 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제가 주장한 게 아닙니다..무슨 근거로 제가 주장한 설이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2차사료인 중국문헌과 3차 사료인 삼국사기가 충돌할땐 심각한 오류가 나타나기 전까진 2차사료에 신빙성이 있다는 건 당연한거 아닐런지요..
남의 글은 전혀 읽지를 않는군요...칠오삼 논쟁이라 하여 일본의 고대국가시기를 5세기 말, 6세기 초로 일본학계도 주장하는걸로 압니다..3세기는 폐기 처분될 정도죠..
ebs 특집다큐 한반도의 왜..그리고 kbs 다큐 역사를 찾아서 에서 가야사부분, 마한,영산강 부분을 찾아보시고 읽거나 듣거나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나가다.. 10.04.03. 21:06
그리운길님이 올려 놓은 본인의 댓글을 보시고 말씀하셨으면 합니다. 거기서는 일제시대 일본학자의 애기는 없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영광군동리 주구묘를 거론한 분은 그리운길님입니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영광군동리 주구묘 즉 한국의 주구묘에서 계통적 연결되는 것을 검토하지 않는것이 안타깝다고도 한 분도 그리운김님입니다. 왜 일본의 경우를 가져와서 애기하는지 2000년이후 논문을 언급하는지 .... 그리운길님 반론을 정확히 하시길 바랍니다.
지나가다.. 10.04.03. 21:23
두번째 댓글에 대하여 : 그리운길님이 이른바 <한반도의 왜의 중심이동설>을 거론하였는데 본인의 주장이 아닌데도 언급한것은 최소한 동의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요? 설마 동의 하지도 않으면서 생각난다며 툭 던져 놓은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아울러 그리운길님의 알려주지 않아도 방송 다규프로그램에서 다루는 대가야의 섬진강유역 진출에 대한 논의 황강남강수계에 진출에 대한 논의는 다큐수준이상 알고 있답니다. 본래 저의 글은 5세기말 6세기초반이라는 시대로 한정되어 있거든요. 저의 글에서도 박천수선생의 견해를 따르며 대가야가 이 지역에 진출하고 이어 백제가 진출하여 장악하는 과정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다.. 10.04.04. 11:19
그리고 뜬금없이 칠오삼논쟁 즉 일본의 국가형성논쟁을 왜 말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저의 이전글이나 윗글이나 칠오삼 논쟁과는 주제가 다르답니다.

첫번째 댓글에서 그리운길님이 <<관리의 무덤을 왕, 천황의 묘제와 동급으로 한다...참.ㅜ.ㅜ>. 언급했는데요. 좀 그렇군요. 착오인지 뭔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전방후원분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인데. 전방후원분은 최고위급 수장의 무덤양식이긴 하나 천왕과 천왕가만이 독점하는 전유물이 아니랍니다. 일본열도에서 전방후원분이 보이는 곳을 알아보면 됩니다. 이미 저의글에도 언급되어 있지요 구주계 전방후원분이라고.
그리운길 10.04.04. 02:54
여러학설과 여러학자들의 견해를 얘기하면서 마치 님의 의견이 통설처럼 비추어진다는데 문제겠죠.
또한 그런식으로 비추어지지 않았다면 댓글도 달지 않았죠.
국내학자와 일본학자들 대부분이 주구묘에서 장고형무덤 또는 전방후원분으로 변화 하였을꺼 라는게 통설입니다
또한 무녕왕이 기문대사를 공취한 이후, 성왕시기에 영산강유역에 직접지배를 하였을 것이다 라는게 또한 통설이고요
주구묘, 전방후원분은 세력들의 권력자 무덤으로 열도통일전엔 여러곳에서 발견되지만
통일이후엔 천황의 무덤일거라는게 일본학계의 통설입니다...

전문적인 형식의 글을 올리려면 통설은 이러한데,,나의 생각은 이렇다 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지나가다.. 10.04.04. 11:00
그리운길님 ..통설?? 국내학자들이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의 견해를 제시하며 일본의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논한것은 있으나 가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논하는 논고를 제시한것이 있나요? 정확히 알고 말하길 바랍니다.. 다시말하지만 일본의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일본측 연구자들이 열도의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논하였겠지만, 국내학자들이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이 한국내의 주구묘에서 계통을 찾을수 있다는 논고가 있습니까!!! 설마 윗글에서 제시한 인터넷에서 떠도는 무지에서 비롯한 짜집기 글쓴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지나가다.. 10.04.04. 11:23
통설을 말하며 한반도 왜의 중심이동설 어쩌구말한 사람이 그리운길님이었던것 같은데 이런 엉뚱한 애기가 통설인가요..? 설마 통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것은 아니겠지요.

반론한것에 그저 근거없이 통설운위하는 본인의 주장만 반복하시니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하죠

한반도에서 아니 영산강유역에서 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발전? 계통이 이어진 것이 있습니까? 그런 고고학적 근거가 있으면 제시하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그러한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천왕의 무덤이 한반도에서 유래되엇다고 대서특필할만한 특종감이랍니다. 그리운길님만이 이런 특종감을 독점하지 말고 제시하여 주시면 좋겠군요
지나가다.. 10.04.04. 11:12
그리고 한가지더 일본열도의 통일시기에 대하여 칠오삼논쟁을 자주언급하던데, 그리고 위 댓글에서는 전방후원분이 열도통일후에 천왕만이 독점한다고 하였는데 그리운길님이 생각하시는 통설이 이런것인가요?.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운길님은 구주에서 5세기 후반에 다시 전방후원분이 많이 축조되는것으로 볼때,그리운길님은 일본열도의 통일은 칠오삼논쟁중에 7세기설을 지지하는가 보군요.

그런데 어쩌죠 7세기경에는 전방후원분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고분시대는 종막을 고한 시기가 되거든요. 그렇다면 그리운길님이 말씀하신 일본열도 통일 후에 천왕이 전방후원분을 독점할수 있을까요? 이것이 통설인가요? 
http://cafe.daum.net/alhc/3Cdg/250?docid=CxSE3Cdg2502010040118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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