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Thursday, January 30, 2014

초기의 왜는 백제의 분조(分朝)

일본에는 일본 최초임을 주장하는 두 개의 절이 있다. 하나는 588년 백제가 보내준 부처 사리를 토대로 596년에 만든 나라(奈良)현 아스카촌(明日香村)의 비조사(飛鳥寺, 아스카테라)이고, 다른 하나는 오사카 시내에 있는 593년에 건립됐다는 사천왕사(四天王寺, 시텐노지)이다. 두 절이 제각기 최초임을 주장하는 것은, 부처 사리를 받은 것을 기준으로 하느냐 실제로 지은 것을 기준으로 하느냐의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절 규모는 사천왕사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다. 비조사는 매우 컸다는데 몇 차례 불이 나면서 크게 축소됐다고 한다. 이 절에 일본 최초의 청동불상인 아스카 대불이 있다.

 

 

아스카대불이 있는 비조사. 고졸한 모습이다.

 

오사카의 사천왕사. 웅장한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절이 모두 백제의 도움을 받아 세워졌다는 것이다. 4세기 말~5세기 초 일본에 문물을 전해준 대표적인 백제 인물로는 일본 천왕 태자의 스승이 됐던 왕인 박사가 꼽힌다. 지금은 ‘아스카베(飛鳥戶)신사’로 이름을 바꾼 오사카부 히비키노(羽曳野)시의 ‘곤지왕(昆支王)신사’도 백제의 대(對)일본 영향력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백제 역사에서 곤지왕은 없지만 곤지는 있다. 그런데 곤지에 대한 기록이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삼국사기’는 곤지를 고구려 장수태왕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백제 21대 개로왕의 아들이고 부하에게 피살된 22대 문주왕의 동생으로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적어놓았다. 아무튼 곤지는 백제의 왕자가 분명한데 일부 학자들은 일본에서 그가 21대 웅략(雄略, 유라쿠) 천황이 됐다고 보고 있다. 이 의견을 가진 학자들 중 일부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의 주인공인 15대 응신과 16대 인덕 이래 21대 웅략 천황까지는 백제계인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 곤지왕을 모신 곤지왕 신사. 지금은 아스카베 신사로 불린다.

 

 

고대국가 왕실이 하나의 성(姓)으로 내려갔다고 보는 것은 큰 오해다. 여섯 부족이 모여 시작한 신라의 초대 임금은 박혁거세였으나 후대의 왕은 김씨로 바뀌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광개토태왕비에는 추모)은 해모수의 아들이니 성이 해(解)씨일 가능성이 높은데, 후대 왕은 고씨였다. 백제도 여러 번 왕통의 교체가 있었다. 고대에는 국가 의식이 불분명했던 것 같은데, ‘일본서기’는 웅략천왕이 둘째 아들인 마다(未多)를 백제로 보내 24대인 동성왕(재위 479~501)이 되게 했다고 적어놓았다.

 
그렇다면 고분시대 초기 왜의 주추세력인 야마토 국은 백제와 아주 가까웠다는 뜻이 된다. 야마토는 백제가 일본 열대에 운영한 해외 방계왕조인 분조(分朝)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해외 분조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해외영토나 해외식민지가 된다. 그러니 백제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문화를 전수했고, 백제의 왕들도 일본에 살다가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관미성을 빼앗김으로써 서해 제해권을 상당부분 상실했다. 그러나 ‘백가제해’에서 국호를 뽑아낸 나라답게 일본을 잇는 해상권은 유지했을 수 있다. 이 해양권 때문에 백제는 왜와 더욱 가까워져 한 나라처럼 움직였다는 것이다.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우연히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다. 이 무덤에는 나온 묘지석 때문에 묻힌 이가 25대 무령왕 부부라는 것과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斯麻)라는 것이 확인됐다. ‘일본서기’에 사마가 있었다.

 
앞에서 밝혔듯 ‘일본서기’는 곤지를 개로왕의 아들이 아닌 개로왕의 동생으로 적어놓았다. 그러한 개로왕이 임신한 자기 부인을 곤지와 함께 일본으로 보냈는데, 가는 도중 부인이 ‘각라도’라는 섬에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백제 사마왕이 됐다고 적어 놓았다. 곤지왕은 차남을 백제로 보내 동성왕으로 삼았는데 그가 죽자 사마를 보내 무령왕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곤지왕이 죽자 후손들이 곤지왕 신사를 만들었다.

 

 

곤지왕 미스터리

  

이 신사는 매우 컸었다는 데 정한론(征韓論)에 따라 한반도 정복을 준비하던 1800년대 후반 이름을 ‘아스카베’로 바꾸게 하고 규모도 암자만한 크기로 줄였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이 신사를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다. 때문에 횡액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액막이’에 애를 쓴다. 액막이를 하는 곳이 바로 신사다. 액을 잘 막아줄 수만 있다면 외국에서 들어온 신도 마다하지 않는다.
때문에 한국계 전통이 남아 있는 신사도 줄이기는 해도 없애지 않는다. 없애면 그 지역 주민들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사이타마 현에는 고구려 마지막왕인 보장왕의 후손을 모신 고마(高麗)신사가 있다. 삼국통일 후 일본에서는 백제가 강해졌는데, 이 신사는 세를 유지하며 살아남았다. 고마신사가 유지된 가장 큰 이유도 영험한 액막이였다.

 
무령왕 다음의 백제 왕은 성왕인데 성왕이 백제는 통치하던 시절 간사이 지역에서는 불교가 크게 일어나고, 유교도 전해져 율령이 정비돼 고대국가 기틀이 다져졌다. 일본은 고분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이때는 특별히 ‘아스카시대(552~645)’라고 부른다. 이 시기 백제의 많은 실력자들이 일본에 건너와 문물을 전해주었다. 그때 야마토국에서는 친백제계인 소가(蘇我)씨 가문이 군장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소가씨 가문은 일본 최초의 여성 천왕인 스이코 천왕 뒤에서 섭정을 한 성덕태자와 연합했다.

 
이때 야마토 국은 백제 분조 성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백제와의 협력 정도는 더욱 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쇼토쿠 태자가 섭정을 할 때 일본 최초의 절인 비조사(아스카테라)와 사천왕사(시텐노지) 등 많은 절이 건설되고 율령이 반포되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에서 나오는 유물은 백제 것과 매우 흡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던 후지노키(藤ノ木) 고분 발굴이다.

 

 

후지노키 고분에서 나온 왕관. 신라 왕관과 모양이 비슷하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 왕관 꾸미개(장식)

 

 

둥근 무덤이었던 이 고분은 1985년 도굴되지 않은 형태로 발견돼 일본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1988년 시신이 들어 있는 석관을 열자, 석관 안에는 놀랍게도 금동관식, 금동제 신발, 환두대도 등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 백제와 왜의 친연성이 또 한번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똑 같지는 않았다. 이 고분에서 나온 이식은 신라형이고 왕관도 신라형이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2331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