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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31, 2014

마한과 야요이의 묘제는 주구묘중에서도 분구묘이다


김권중 선생이 2008년에 발표한 논문의 일부를 토론목적으로 발췌해서 올립니다.

 

<요약>

청동기시대 주구묘는 주구라는 묘역시설로 매장주체부 주변을 구획하는 묘제로서 고고학적인 의미는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주구묘의 최초 등장은 한반도 남부지역 전체에서 거의 동시기 인 전기 후반이며, 변화 양상에는 지역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과는 달리 피장자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두드러지며, 특정지역에서 주거공간과 구분된 묘역을 형성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발생 당시의 주구묘는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 같은 분구묘적인 개념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철정리와 옥방8지구의 경우와 같이 복수의 매장시설을 설치하는 방식이 적용된다고 하여도 전반적으로 분구묘의 매장관념에 적합하지는 않다고 판단된다. 또한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의 직접적인 계보를 상정하기에는 시기나 매장방식, 구조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의 묘제인 지석묘로의 대체는 자연스럽지 못한 면이 있다고 판단되지만 영남 남서부지역 주구묘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원형과 방형계통이 공존하는 전통은 지석묘 단계에도 자연스럽게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주구묘의 발생에 관한 문제는 외적인 요인보다 현재로서는 전단계와 다른 매장관념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으로 내적인 요인에 의해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본문 발췌>

주구묘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이르러 확인되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편년뿐만 아니라 기원이나 계보, 성격, 의미 등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진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의 기원을 다루면서 국내 주구묘의 기원이나 계보 등에 대해 연구된 것이 있는데(中村2004), 매장관념에서 유사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출토유물과 구조, 연대 등 여러 가지 측면
에서 해결되지 않는 점이 많다.

이 글은 최근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한 주구묘의 연구를 위해 조사된 자료의 소개와 함께 묘제의 특징과 구조, 출토유물의 양상을 파악하여 지역별 편년과 변천 양상에 대해 살펴볼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또한 주구묘 발생 이전 묘제와의 관계, 지석묘와의 관계,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의 관계 등을 검토하고, 궁극적으로는 주구묘가 내포하는 고고학적 의미의 해석에 초점을 두고자한다.

주구묘는 기존에 周溝石棺墓, 周溝附石棺墓등으로 명칭되었으나 매장주체부의 형태가 전형적인 석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석곽형과 목관도 있기 때문에 주구라는 독특한 묘역시설을 강조하기위해서‘주구묘’로 부르고자 한다. 한편, 한반도 서남부지역 원삼국시대 주구묘와의 구분도 혼동의 우려가 있지만 청동기시대라는 시대명칭을 덧붙여 사용하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까지 주구묘로 파악되는 것은 11개 유적에서 37기 정도이다. 대체로 네 지역에 집중되고 있는데 그 분포를 살펴보면 2개 유적이지만 강원 영서지역에서 가장 많은 25기가 확인되었고, 그 외는 영남 남동부지역 4개 유적, 영남 남서부지역 3개 유적, 호서지역 2개 유적으로 각각 1~3기씩의 주구묘가 확인되었다.

 

(중략)

한반도의 주구묘는 유사한 형태인 일본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보다 연대가 앞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기원은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우선 검토해야할 지역은 역시 중국인데, 중국에는 山西省候馬市蕎村遺蹟이나 鳳翔縣秦公陵園遺蹟에서 야요이시대 방형주구묘와 유사한 것(圍溝墓)이 발견되어 춘추·전국시대 秦國의 영역에서 주민과 함께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兪偉超1996). 그러나 이 묘제는 전국시대 말기의 묘제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安信元2004) 연대적으로 차이가 있고, 규모나 구조, 성격 등이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주구묘와는 차이가 커서 서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거리를 좁혀 북한지역을 본다면 현재까지 주구묘로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구묘의 기원은 결국 남한 내에서 구해야 한다고 판단되는데, 최근 中村은(2008)은 남한내 주구묘 출현을 지석묘의 출현과 동일한 시점으로 보고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다양성을 들어 북방에서 지석묘가 전파되었을 때 조성집단의 사람 수 등의 관계로 구축 재료가 돌에서 흙으로 전환된 것으로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호서지역과 같이 주구묘가 지석묘의 출현 시점이 거의 동일한 지역도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지석묘 출현 이전이나 직전에 등장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지석묘 조성집단의 인원수 문제로 인해 돌이 흙으로 전환된 것이라는 점은 뭔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주구묘의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주구묘 발생 전단계의 묘제를 고려해야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전단계의 묘제는 명확하지 않고 몇몇 사례가 있지만 구조적으로 차이 있다. 결국 현재로서는 주변지역이나 전단계에서 그 기원을 찾기보다는 단순히 묘제만이 아닌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과 필요 즉, 집단내의 계층화가 진전됨에 따라 발생된 결과로서, 유력개인이나 집단의 강조를 위한 매장관념의 변화와 같은 내재적인 요인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좀 보충설명을 하자면 주구묘는 청동기시대 전기, 다시말해 지석묘(고인돌)보다 더 이른 시기에 사용된 무덤 양식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것입니다. 마한 분구묘의 일종인 주구묘와는 또다른 묘제입니다. 역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교해서 주구가 있는것만 동일할 뿐 전체 구조, 평면 배치가 전혀 다른 묘제입니다. 아무리 연대가 올라간다해도 이걸 근거로 전방후원분의 직접적 기원이라고 말하긴 힘듭니다.


  • 오다 후지오 후쿠오카대학 명예교수가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학계의 통설은 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구묘가 일본의 독자적인 묘제형태라면 전방후원분도 일본의 독자적인 묘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지역에 주구묘가 있는 지에 대해 한때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런데 한반도의 서남부지역인 경기,충청,호남에서 전방후원분의 기원이라고 일본이 주장하는 원형, 방형, 삼각형등 다양한 형태의 주구묘가 대량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 매장된 두형토기를 근거로 그 조성시기는 철기시대 초기인 기원전3세기로까지 올려 잡고 있습니다. 아제님이 올린 논문은 어떤 논문인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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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방후원분의 기원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철기시대의 주구묘가 아닌 그 보다 훨씬 이전인 청동기시대 주구묘얘기를 가지고서 논거로 삼으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건 좀 엉뚱한 얘기란 말씀입죠. 이홍종 고려대교수에 따르면, 1996년 충남보령에서 주구묘 발굴을 할 때 주구묘 일본독자설을 주장하던 일본학자가 참관을 하고서는 자신이 20,30년 동안 연구한 결과가 다 물거품이 되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일본학계의 통설도, 우리학계의 주류중의 주류인 사람들의 의견도 소수의견으로 단칼에 날려버릴 수 있는 님의 대단한 학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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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잔잡아권하실님...그렇게 빈정거리는 어조로 댓글을 다실 수 밖에 없나요.

    주구묘 중에 분구묘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초기철기시대 이후의 주구묘와 청동기시대의 주구묘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구묘만 설명한 겁니다. 초기철기시대 이후의 (분구묘의 일종인) 주구묘에 대해서는 이 글보다 먼저 글을 올려놓았구요. 그 글의 댓글에 한반도 분구묘의 주구가 일본에 전래되어 전방후원분을 구성하는 요소로 사용되었다고 이미 썼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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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우선, 주구묘와 분구묘가 딱 구별되는 그런 개념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같은 현상을 주구에 촛점을 맞춰 표현하게 되면 주구묘고 분구에 촛점을 맞춰 표현하게 되면 분구묘인 것이고,,,주구 즉 무덤주위의 도랑은 분구를 조성하기 위해 흙을 파낸 흔적으로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주구묘=분구묘라고 할 수 있는거지요. 그리고, 우리학계의 주류에 속하는 분들의 의견도 걍 소수라고 하시니, 님이 참 대단하게 보인다 이런 말씀입죠. 아 물론 저도 주류라고 해서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요. 어쨌든 님은 전방후원분이 일본 거다 이걸 죽어라 강변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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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우리 주류학자중의 상당수가 전방후원분 자체도 우리 쪽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는 상황에서 한국사람인 님이 전방후원분은 일본 것이라고 강력하게 얘기하시는 게 흥미롭다 이런 거죠. 우리측 전방후원분이 조야하고 뭐 그런 것이기 때문에 주변부적이고 종속적인 것이다라는 결론도 받아들이기 어렵고요, 원래 더 오래된 원형이 작고 소박하고 그런 것 아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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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초기철기시대 이후부터 사용되어서 마한의 주묘제인 분구묘와 그 분구묘의 일종인 주구묘와 청동기시대의 주구묘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 글은 청동기시대의 주구묘 이야기를 한 것인데, 왜 자꾸 초기 철기시대 이후의 주구묘 이야기를 합니까. 초기 철기시대 이후 한반도의 분묘의 주구는 일본에 전래되어 전방후원분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사용되었다고 이미 처음 토론이 벌어진 글에서부터 제가 댓글을 달았는데 자꾸 주류 견해를 제가 부정한다는 둥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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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구묘와 주구묘가 구분되지 않는다는건 초기 철기 이후의 분구묘와 주구묘가 그런거고, 이 글은 순수하게 고인돌보다 먼저 출현한 청동기시대의 주구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건 평면형태가 아주 길쭉한 방형이어서 초기 철기 이후의 주구묘 내지 분구묘와 완전히 다른 별개의 매장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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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방후원분 관련 논쟁에서 주구묘에 대한 얘기도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보니, 님이 위 논문을 올리신 게 이 논쟁을 염두에 두고 올렸다 그렇게 판단한 것이지요. 그럼, 이 논문을 올리신 이유가 뭡니까? 직접적으로 전방후원분 얘기와 관련이 없는데 어떤 이유때문에 올리셨는지요? 그냥 청동기시대에도 주구묘가 있었다 이런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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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적인 편년,용어에 대해서조차 통하지 않으니, 분구묘,주구묘 등 주변적인 용어부터 우선 정리하자는 것이죠. 초기 철기시대 이후의 주구묘 이야기만하다가 나중에 청동기시대 주구묘와 혼동하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일단 이 논문도 올린 겁니다. 그리고 주구 자체가 주변국(중국)에 나타나는지 여부 등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주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논문이어서 올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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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본문에서 이미 "마한 분구묘의 일종인 주구묘와는 다르다"고 밝혔고 논문의 인용부분에도 "한반도 서남부지역 원삼국시대 주구묘와의 구분도 혼동의 우려가 있지만 청동기시대라는 시대명칭을 덧붙여 사용하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는데 혼동을 하신건 님이 제대로 본문을 읽지도 않고 댓글을 단다는 이야기일뿐 저한테 의도를 거론하실 상황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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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런 것이었습니까? 알겠습니다. 전방후원분 얘기를 할 때 근데 초기 청동기시절의 분구묘까지 거슬러 올라가 혼동을 하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새로운 정보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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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제님, 별로 생산적일 수 없는 토론은 아니함만 못하니 님이 의견을 밝히지 아니함만 못합니다. 초재님이 이런 비슷한 상황을 이글루에서도 겪으셨었는데 제가 오히려 폐만 끼치게 되더군요. 저는 당분간 입을 봉할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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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좀...시누이 역할하시는 겁니까? 님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예의에 비추어 봤을 때 좀 너무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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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모든 것에서 한국이 일본의 기원이라고 설명하려고 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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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 몰라서 물으십니까?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지요. 모든 부분에서 일본에 앞서있었던 한국이 일본에 문화전파를 하고 정치쪽에서도 백제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일본인들도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고 유물,유적등이 증명하고 있잖아요? 근데 왜 굳이, 이런 일반적 법칙을 무시하고 그 반대를 주구장창 할까요? 뭘 몰라서 그러는 걸까요? 그럼 이해가 갑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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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부분에서 일본에 앞섰다는 증거가 뭔가요? 백제, 신라보다 일본의 영토와 인구가 훨씬 크고 많았습니다. 광개토 대왕비와 중국의 사료도 일본 쪽에 유리하구요. 심지어 우리나라 정사도 일본의 침략 기록으로 도배를 했지요.고대에 일본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안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요. 지독한 열등감 외에는 생각할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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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부분에서 일본에 앞섰다는 증거는 널려 있잖아요. 일본 출신입니까? 영토와 인구가 언제 기준인데요? 백제,신라 망했을 때도 일본열도는 전체가 통일되지 않았고 동북지역은 번외지역이었으며 북해도는 아예 관심밖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 기준으로, 일본 열도 전체 기준으로 보면 영토와 인구가 훨씬은 아니더라도 많았을 수는 있겠지요.근데 영토와 인구가 국력의 절대적 기준이던가요? 수,당의 백만대군을 물리쳤고,사서에 대륙의 북부와 동부까지 장악했으며 당태종 이세민을 항복시켰다 기록돼있다는 고구려가 영토와 인구가 지나국에 비해 많았습니까? 광개토비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본측의 주장을 채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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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가 뭡니까 도대체? 여기 다른 나라 사람도 많이 들어온다고 하던데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우리나라 정사에 나온 기록은 전쟁도 아니고 잠깐 잠깐 들어왔다 전투 수준의 노략질을 해댄 왜구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죠. 19세기에 해적들이 강대국의 영토, 식민지에 수없이 약탈질을 해댔는데 그럼 얘들이 최강이었습니까? 또 삼국시대 때 고대 얘기를 하는데 여태까지의 모든 역사를 왜 얘기하나요? 또 왜의 실체 자체가 한반도에서 출발한 왕조 또는 가야, 백제의 왕조일 가능성이 아주 큰 상황인데 그런 것이라면 왜를 지금의 일본개념으로 대치시킬 수 있겠어요? 대륙, 한반도, 열도에 걸친 한민족 내부 투쟁이라고 볼수있지요. 영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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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척한 미국식민지 정부가 영국에 반기를 들고 싸웠는데, 그럼 영국과 전혀 다른 종족, 원래 부터 그 땅에 살며 그 땅을 지배해온 토종 종족, 다른 정체성을 가졌던 국가인 미국이 영국에 맞서 싸운 것인가요? 미국이 학살하기 전 인구가 2억이나 되고 영국이 비교도 안되게 엄청난 땅덩어리를 보유했던 인디언의 국가가 독자적으로 영국에 대항한 전쟁이던가요? 인디언한테 열등감 느끼는 미국인들이 있나요? 그건 굳이 그런 식으로 꼬자면 열등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라고 하는 거에요. 한국말의 뜻도 쌩반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외국인군요. 그 중에 특히, 일본인은 적반하장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잘 하긴 합니다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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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라님 일본의 생산량이 한국의 생산량을 앞질렀다는 시기는 아마 헤이안 시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중/일 3국의 면적 당 생산량 내지 효율성은 경기/충청 지역만한 곳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자료가 일본 전역(큐슈+시코쿠+혼슈+혹카이도)을 기준으로 한 것 아닐런지요. 당시 일본이라고 불리는 세력의 영향력은 확실하게 보면, 오:사카 정도로 보고 있지 않은지요. 덧붙여서, 일본의 후진성(?)을 든다면, 백강 전투에서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어이없게 소진했다는 점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을런지. 암튼,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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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쯤되면, 왜의 정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도 필요한 시점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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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afe.daum.net/molanthro/I4r2/7?q=D_lZmDgpvDsM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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