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his Blog

Friday, January 31, 2014

혼다는 백제성씨


근구수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응신천황릉

부여에서 나온 백제의 국시는 역시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의 국시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다물(담로)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고 관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한 고이왕 이후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기부터 부여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차원에서 만주지역 녹산에 위치한 부여를 정벌하여 부여세력을 전연지역으로 몰아 내고(자치통감 기록), 백제담로지역인 일본열도의 마한세력(왜)와 연합하여 단군3조선 중 마조선에 속한 마한과 가야.사로국을 정벌하였고(일본서기 기록),단군3조선 중 번조선(기자조선)에 속하였던 요서.산동.절강성지역을 정벌(지나문헌-북서.양서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영토확장에 나선다.

그러나, 신라사관론자 김부식이 고려 때 편찬한 [삼국사기-백제본기]기록에는 이러한 장대한 백제의 영토확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백제 근초고왕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한수이남에서 군대사열을 하면서 황제국을 상징하는 노란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삼국사기]기록에서 당시 백제는 동아시아 강국임을 알 수가 있다. 근초고왕은 너무나 유명한 백제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버지 근초고왕에 가려진 근구수왕은 아버지 근초고왕보다 유명세가 낮은데 사실은 근초고왕보다 더 영토를 확장한 왕이 근구수대왕이라 할 것이다. 근구수대왕은 태자시절부터 전쟁터를 누비면서 백제의 기상을 드높인 왕이다.훗날 고국원왕의 손자 광개토태왕이 할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초토화시키는 배경이 되지만,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남평양성(북한 평양성)에서 전사시킨 인물이 근구수왕이다.

일본의 응신천황릉의 주인은 백제 근구수대왕인가?

백제 왕들의 죽음을 [삼국사기]에서는 '붕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무녕왕릉비문은 '붕어'라는 기록을 남겨 고구려.백제.신라.가야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의 내용에 신뢰성을 주었다. '붕어'는 천자국의 왕의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백제는 22제후국을 거느린 천자국임을 '붕어'라는 표현으로 입증하고 있다. 고구려 왕들에 대한 기록은 장례 후에 묻힌 장소(예컨대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묻혀 붙어진 왕명이다.고구려 왕들은 죽은 후 묻힌 장소가 왕명이 된다)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백제 왕들은 죽은 후 묻힌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 근구수왕은 375 – 384까지 9년간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측 자료는 그의 생몰연도가 320 – 394로 74세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 (295 – 375)의 둘째 아들이며 부왕과 함께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부왕이 왕위에 오른 서기 346년 그의 나이 26세 (부왕 51 세)였고 근초고왕시대에 역사에 알려진 녹산의 부여정벌과 마한과 가야합병, 고구려와 치양전투 그리고 남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 왜의 신라침공이 실제로는 태자 시절 근구수왕과 관련한 기록들이다. 근초고왕이 빛나는 진짜 이유는 아들 근구수왕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상 그가 백제왕위에 있던 것은 9년뿐 (나이 55세부터 63세까지)이다. 태자때부터 제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고 74세까지 살았다는 근구수왕의 남은 세월은 역사의 어디에 있을까? 그는 아버지 부여구(근초고왕)를 꼭 빼어 닮은 싸움꾼이었고, 한반도, 일본열도 그리고 지나대륙까지 위세를 떨친 인물이다. 아직까지 역사는 근구수왕의 모습을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머리땅을 의미하는 야마토Yamato라는 나라는 이 무렵 일본열도에 건국되었다고 본다. 일본 천황중 15대 응신(應神 Emperor Ojin)이 있는데 이 사람을 Yamato의 시조로 본다. 일본열도에서 Yamato의 우위를 확실히 다져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것이다. 천황기록은 기원전 서기 660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사람앞에 기록된 14명의 천황은 이 사람을 위하여 이 때까지의 세월을 대강 짜 맞추었다. 일본기록에 응신의 재위기간이 270 –310의 40년간으로 되어있으나 이를 믿는 역사학자는 없다. 

다음은 응신왕 시절의 기록들이다. 

백제의 직조기술자, 야금 기술자 입국. 백제 근초고왕의 칠지도, 칠자경 헌상. 근초고왕 시기의 백제인 아직기 말 두필 가져 옴. 근초고왕 시기의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와서 강의하며 일본왕자의 스승이 됨.(한국측에는 왕인 기록이 전혀 없음).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대마도)인, 신라인들이 이주해 옴. 이들로 하여금 큰 못을 만들게 하고 한인지(韓人池)라 함. 유쯔키기미(弓月君- 훗날의秦氏) 가 백제에서 인부 백 이십현(縣)을 데리고 귀화하였다. (이들은 쿄오토 가쓰라강에 대규모 토목공사로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 농사를 하고 농잠업으로 비단을 생산하여 농업생산력 증진에 공헌한다). 이 무렵 아야(漢)씨, 사케노기미 (酒君)등 유력 백제귀족세력이 대거 일본에 도래한다. 이후 광개토태왕의 백제정벌시 백제 피난민의 행렬이 가야지방을 통하여 일본으로 유입되어 오오사카의 Naniwazu(難波津)부두는 백제사람으로 넘쳤다. 이러한 인구이동 때문에 백제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 들고 야마토는 비약적인 국력신장을 이룬다.


[칠지도]"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일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요약하면 백제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가 369년에 백제의 마한.가야정벌에 군대를 지원해 준 아들 왜왕에게 특별히 '칠지도'라는 칼을 만들어 하사하니, 잘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라는 뜻이다. 

역사가들은 이 무렵 왠지 모르지만 이상할 정도로 백제와 왜의 관계가 좋았다고 본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때 백제 근초고왕은 다섯가지 색깔비단 한 필씩과 쇠뿔로 만든 활, 철궤 40 개를 왜국 사신에게 주었다. 또 보물 창고에 있는 진기한 물건들을 보여 주며 백제에 보물이 많다는 것을 자랑한다. 백제가 왜국 사신에게 선물을 하고, 보물을 자랑한것은 왜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가야연맹의 탁순국으로부터 받은 왜국(백제 담로)의 병사를 목라근자 장군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했다. 백제 장군의 지휘를 받은 왜국의 병사들은 백제군과 함께 가야지역에 속하는 경상도 남서 지역의 7개 나라를 정벌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 땅을 왜국이 백제에게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섬진강 하구의 다사성도 보태 주었다고 한다. 백제가 왜국에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고도 되어 있다. 과거 일본학자들은 당시 왜국이 정벌한 땅을 백제에게 하사할 만큼 강한 나라였고, 백제는 일본에 조공을 바친 나라로 보았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백제멸망 후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인들이 한반도와 인연을 단절하면서 일본열도위주로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일본사학자들이 해석에 있어 헤갈리며 역사날조를 하는 것이다.

오진왕의 이름은 Honda Wake 또는 Homuda Wake (譽田別) 이며 Homuda란 근초고왕의 잠시 수도로 삼았던 한산 (漢山 또는 漢田)을 뜻한다고 한다. 오진왕, 근구수왕, Homuda Wake는 동일인물인 셈이다. 백제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야마토의 닌토쿠왕이 그의 이들이다. 야마토라는 통일왕조의 출현은 근초고(Yamato Takeru)와 근구수(Ojin or Homuda Wake) 부자의 2대에 걸친 정복전쟁( 318년부터 390년까지)의 결과물이다. 근구수왕Homuda Wake는 서기 390년 나이 70에 야마토(大和) 라는 나라를 오사카에 세운다. 만주 부여족의 후예로 백제에 이어 야마토의 지배자가 된 Homuda왕은 가와치(河內)의 구다라노(百濟野)에서 제천(祭天)의식을 올리고 만세일계의 영원한 일본지배를 기원한다. 그로부터 1,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아직도 천황으로 있다. 

얼마 전 히로히토 일본왕이 자신이 백제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방송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를 전제로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일본왕을 통합이데올로기로 악용했던 일제시대 일본군부는 구다라 노(백제 벌)를 하비키노(羽曳野)로 개명하여 백제의 남은 그림자마져 없애 버린다. 

근초고왕(응신천황)은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어 하치만(Hachiman) 신궁에서 모시는데 전국에 3만의 하치만 신궁이 산재해 있고 오사카 응신천황능 앞에 하치만 신궁이 함께 세워져 있다. 아버지 근초고왕(야마토 타케루倭建命 또는 日本武尊)도 20 – 30대의 대부분을 일본의 전쟁터에서 보냈음으로 그 또한 전쟁터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근초고왕.근구수왕 시기 백제영역(추정)

한반도.일본열도.지나대륙에 거쳐 위세를 떨친 근구수왕의 행적을 추정해 본다면,

362년 (42세) 왜 성무천황의 반란을 진압하고 성무천황비Empress Jingu (336 – 390)를 후비로 취한다. 
363년 (43세) 근구수 왕자와 성무천황비 사이에 왜왕 출산(근구수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 참조) 
364년 (44세) 왜군을 이끌고 마한.가야.신라을 정벌하다.
369년 (49세) 고구려 고국원왕 2만 군사로 백제침공했으나 치양전투에서 반격하여 승리 
371년 (51세) 고구려 남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전사 
375년 (55세) 백제 14대 근구수왕으로 즉위 
376년 (56세) 고구려 침공, 요서.산동지역 경략 
377 년 (57세) 고구려 남평양성 재탈환,절강지역 경략 
383년 (63세) 근구수왕 사망 (삼국사기).실재로는 아들 침류에게 백제왕를 맡기고 오사카로 돌아감. 
383 (63세) – 394 (74세) 왜 Homuda천황으로 재위.그의 순행.전쟁행적이 일본 여러 지방에 전해 옴. 
390 년 (70세) 야마토 (大和) 건국.이 해에 신공황후(백제 근구수왕 왕후-아이 부인) 사망. 
392년 (72세) 야마토 장수 4명을 보내 백제 아신왕을 복위시키고 진사왕을 체포하여 야마토로 압송. 
394년 (74세) 사망.묘는 大阪 譽田御墓山의 전방 후원분. 길이 420미터로 1천명의 인부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지금 일본의 고분가운데 오진릉과 그 아들 닌도쿠(仁德)릉이 가장 거대하며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 

오진능 바로 남 쪽에 그의 아버지 야마토 타케루의 백조능이 있다. google 지도에서 하비키노(羽 曳野) 지역을 확대하면 이들 묘의 위치가 확인된다. 항공사진으로도 식별가능하다. 거기서 청녕 천황능이 곤지왕능이고 서쪽으로 커서를 옮겨 사까이(堺)항으로 오면 거대한 닌도쿠 천황능이 보인다. 

백제 태자들은 보통 백제왕에 즉위하기 전에는 거의 백제담로지역인 일본열도로 건너 가서 왕노릇하다가 부왕이 붕어하면 한반도로 건너 와서 백제왕에 즉위했다. 동성왕.무녕왕.전지왕.부여풍 등이 모두 그랬다. 닌도쿠 천황(337 – 419)은 근구수왕의 장자로 근구수왕의 아들들이 되는 백제 침류왕, 진사왕의 친 형이 된다. 왕인 박사가 372년 일본에 가서 그 스승이 되었다는 왕자가 우치노와케이라츠꼬 (宇遲能和氣郎子)로 나이 10세였다. 이 어린 왕자가 커서 20세 때 백제 15대 침류왕이 된다. 당시 백제와 일본은 백제황실이 경영하는 하나의 나라였고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기 660년 한반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지만 나머지 한쪽 일본열도에는 고스라니 일본백제가 남게 되어 이후 한반도와의 인연을 단절하고 일본열도위주로 백제사를 일본이 '담로'에서 시작한다는 창세신화로 시작하는 [일본서기]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백제초기 한강변의 10여기의 전방후원분들은 일본왕릉의 규모보다 큰 세계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다.그러나 사학계에 식민사관론자들이 득세해서인지는 몰라도 발굴을 하지 않고 산이라며서 그 실체를 감추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전방 원분군이다.




일본의 전방후원분 분포도

전방후원분은 주로 마한지역인 영산강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의 무덤양식인데, 고대 마한인들의 무덤양식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일본열도는 본래 단군조선당시 한반도와 연결된 마한인들의 거주지로서
전방후원분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왕족의 무덤양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건너 온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 동성왕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지나대륙의 백제담로지역을 확장한 왕으로서 그 무덤의 출처를 알 수 없으나 서백제의 왕성인 산동성지역에 '백제래왕'이라는 비문을 가진 왕릉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북위와 전쟁을 벌인 동성왕의 무덤이 아닌까 추정된다.

http://www.kookminnews.com/atc/modify.asp?ik=1809&ru=

No comments:

Post a Comment

Blog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