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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14, 2014

일본서기에 백제왕 부여용이 일본에 건너가 텐치왕이 되고 왜의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고 되어있다. comment


 서기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유민들은 혈연국인 왜국의 군사 지원을 받아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다. 당시에 의자왕의 여동생으로 일본 37대 왕에 올랐던 제명여왕은 본국 백제를 되찾기 위해 군선을 건조하고 탐라국에 참전을 요구하고 왜병을 사비성에 파견하지만 지도층의 내분으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은 망국의 깊은 한을 품고 유민을 거느리고 왜국에 건너가서 38대 텐치왕이 되고,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으로 고쳤다. 이것은 한국고대사에 속한 왜국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 일본이 탄생한 사건이다. 독립국가를 선포한 일본은 멸망한 본국에 속한 왜국에서 벗어나 자주국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신라가 이를 모를 리 없지만 당장 영토분할을 요구하는 당나라의 야욕부터 눌러야 하는 처지에 섬나라의 사정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왜는 이후 철저하게 자신들과 한(韓)민족은 같은 민족이라는 '한일 동족론'이 적힌 고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역사조작과 침략야욕을 불태워 왔다.

 일본 고대사에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백제인 여왕이 존재했다. 바로 히로히토 일왕이 언급한 스이코 여왕이다. 스이코는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스이코 여왕은 백제의 관륵스님을 초빙, 천문지리학을 일으켰는가 하면 한반도의 아악을 이식했다. 어디 그뿐인가. 고구려의 담징을 모셔 금당벽화 등 미술 문화를 일으켰고, 신라 진평왕의 환심을 사, 신라 불교도 도입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양국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일본이야 덮어버리고 싶어 꺼내지 않았다지만 우리의 경우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재야학자들의 지적대로 아직도 '식민사관'의 그림자가 우리 학계에 남아 고대사의 진실규명을 외면하는 것이라면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 망국의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파묻고 덮어버린 고대사의 비밀을 풀지 않으면 한일 양국은 앞으로도 끊임없는 역사 논쟁이나 영토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독도나 대마도 문제보다 고대사의 실체적 접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덮어버린 고대사, 비밀을 풀어라
김진영 편집부국장

2008년 07월 27일 (일) 21:34:20
독도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최근 움직임이 수상하다. 미국 국립지리원 지명위원회가 그동안 한국령으로 표기해오던 '독도-리앙쿠르 암'을 느닷없이 '분쟁구역'으로 변경한 것이나 전직관료의 입을 통해 "한국은 독도를 현상태로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 등이 그렇다. 한국과 일본의 분쟁 때마다 애매한 태도로 일관해온 미국이지만 광복직후 대마도의 영토권을 주장한 이승만독트린 당시 "한국은 대마도 문제에서 일본의 실효적 지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태도와 너무나 다르다. 미국은 한일간의 외교에서 언제나 일본쪽의 논리에 손을 들어주는 사례가 많았다. 물론 이 같은 미국의 태도는 우리 외교의 미숙성에도 원인이 있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미국외교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분쟁구역'으로 지정해 놓는다고 독도가 어디가는 것은 아니지만 '분쟁구역' 변경이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은 예상보다 크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의 집요한 영토확장 야욕은 섬나라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역사관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영토확장 야욕을 좀더 거시적으로 접근해 보면 일본의 뿌리가 어디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사실 한일 양국은 고대사의 수많은 증거물로 인해 부인할 수 없는 연결성을 갖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나 일본서기, 만엽집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는 것이나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 문화가 구다라(백제) 불교문화에 의한 것이라는 점 등 그 증좌는 수없이 많다. 이러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일 양국의 연결성을 확인해 나간다면 독도문제는 물론 역사조작의 문제도 하나씩 풀릴 수 있겠지만 양국 정치권은 그럴 생각이 현재까지 없어 보인다. 이미 한일 양국의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다양하고 내용 있는 연구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공론화 할 경우 한국은 당장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할 길이 없다. 또 일본은 파면 팔수록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상대가 형제국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게 뻔해 가능하다면 외면하자는 심리다.

 이 같은 양국 정치권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양국에서는 고대사의 비밀들이 하나씩 벗겨져 왔다. 지난 2001년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도 그 중에 하나다. 아키히토는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칸무 50대 일왕의 생모 다카노노니이가사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키히토의 아버지인 히로히토 일왕도 지난 1984년 "스이코 일왕 이전 일왕의 역사는 아직 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일왕 중에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분이 일본에 도래하여 그 혈통이 일왕의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라고 하여 '살아있는 신'으로 존재했던 일왕 스스로 일본의 왕통이 한반도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이후 자신들의 조상이 살았던 한반도의 땅을 밟고 이 땅에 살면서 놀랍게도 자신들의 고향이 바로 한반도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양국의 긴밀한 유대가 오늘의 적대적 관계로 바뀐 것은 백제의 멸망 이후부터였다.

 서기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유민들은 혈연국인 왜국의 군사 지원을 받아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다. 당시에 의자왕의 여동생으로 일본 37대 왕에 올랐던 제명여왕은 본국 백제를 되찾기 위해 군선을 건조하고 탐라국에 참전을 요구하고 왜병을 사비성에 파견하지만 지도층의 내분으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은 망국의 깊은 한을 품고 유민을 거느리고 왜국에 건너가서 38대 텐치왕이 되고,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으로 고쳤다. 이것은 한국고대사에 속한 왜국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 일본이 탄생한 사건이다. 독립국가를 선포한 일본은 멸망한 본국에 속한 왜국에서 벗어나 자주국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신라가 이를 모를 리 없지만 당장 영토분할을 요구하는 당나라의 야욕부터 눌러야 하는 처지에 섬나라의 사정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왜는 이후 철저하게 자신들과 한(韓)민족은 같은 민족이라는 '한일 동족론'이 적힌 고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역사조작과 침략야욕을 불태워 왔다.

 일본 고대사에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백제인 여왕이 존재했다. 바로 히로히토 일왕이 언급한 스이코 여왕이다. 스이코는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스이코 여왕은 백제의 관륵스님을 초빙, 천문지리학을 일으켰는가 하면 한반도의 아악을 이식했다. 어디 그뿐인가. 고구려의 담징을 모셔 금당벽화 등 미술 문화를 일으켰고, 신라 진평왕의 환심을 사, 신라 불교도 도입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양국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일본이야 덮어버리고 싶어 꺼내지 않았다지만 우리의 경우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재야학자들의 지적대로 아직도 '식민사관'의 그림자가 우리 학계에 남아 고대사의 진실규명을 외면하는 것이라면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 망국의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파묻고 덮어버린 고대사의 비밀을 풀지 않으면 한일 양국은 앞으로도 끊임없는 역사 논쟁이나 영토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독도나 대마도 문제보다 고대사의 실체적 접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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