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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rch 8, 2014

콘스탄티노플의 멸망


동로마 제국의 멸망 (Constantinople of collapse)
서기1453.
5.29일 .천년의 영화를 누린 비잔티 제국(콘스탄티노플)의 문명이 야만인 투르크 족(오스만 터키)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한 제국이 멸망을
초래하게 까지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들이 작당하여 나라를 망친 것은 어느 시대나 비슷비슷 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
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나 ? 종말이 가까우면 그 나라 국민과 지도자 모두 하나 같이 부패하고 나약하고 무기력해져 국가의 안위가 군사 방위력
가동으로 지켜진다는 것은 잊어 버리고 상대방에 경제 원조 제공으로 매달리지만 결국은 적국의 군비 확장만 도와주게 돼 더 빨리 침략 당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동로마의 멸망도 이런
수순을 밟으면서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2세에게 정복 되었다.

서기324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내란에서 정적들을 쳐부수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나 그 과정에서 장인 막시미아누스 황제. 처남 막센티우스 정제. 매부
리키리우스 황제 등을 전투에서 차례로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정략적 인물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군사적
재능이 풍부한 장남 크리스푸스를 계모 황후와 밀통 했다는 조작 죄목으로 살해했다. 이모든 사실을 아는 로마 시민들의 따거운 눈초리를 피해 동방에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보스포루스 해협 연안. 그리스의 옛 도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서기324년 착공하여~330년 5월11일. 6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비잔티움에 건설한 새 수도는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 이라 하였다.

 

Constantinople 은
세모 꼴의 해양 도시로 군사적으로 천연의 요새였다.  동쪽은 마르마라 해로 북풍과 센 조류가 흘러 전함의 접근이 힘들고 서쪽은 황금각 만에 접해
한 면만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삼중 성벽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은 지중해 와 에게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내성 벽은 높이
17M× 너비 5M에 40M마다 높이 20M× 너비10M의 사각형 탑들이 연결되어 있고, 외 성벽은 높이 10M× 너비3M에 역시 40M 간격의
높이15M× 너비6M의 탑들이 내 성벽 탑들과 엇갈리게 서 있었다.  외 성벽 밖으로 깊이10M ×너비 20M의 목재 호로 가로놓아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Constantinople의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누스11세로 팔라이온러구스였다. 성실하고 깨끗한 인품으로 평화 시의 황제로는 흠잡은 곳 없는 인물이나  국가 위급 전란
시에는 과단성이 없고 머리회전이 늦어 침략자에 야욕의 제물이 된 황제였다. 재상 루카스노타리스는
재물을 몹시 탐해 재상 업무는 뒷전으로 돈벌이에 치중해 자유무역항Constantinople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는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와도 연결 라인을 가져 그 쪽의 긴급한 부탁도 들어주며 나중 대비도 하는 이중 행보를 걸었다.

 

잘 키운 반역자 한사람이 백만 대군보다
낮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나중Constantinople성이 함락되자 제일먼저 금은보화를 바쳐 들고 술탄 앞에 나가 잠시 동안이지
만 후대를 받는다. 그러나 두 달후
남색을 밝히는 메메드 2세가 노타리스의 12살 아들을 잠자리 상대로 궁전에 들어 보내라 명령하자 이를 거절할 수밖에 없어 술탄의 병사들이 달려와
두 아들과 노타리스의 목을 베여갔다. 백성의 원성을 산 자를 살려두면 민심 안정에 방해가 된다는 정치적 판단과 기존 지배층 단절을 위한
정책에서였다.

 

반역자는 일신의
영화를 위해 조국을 배반하지만 결국에는 도움을 준 상대도 믿지 않아 적국과 내통 했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노타리스도
평소 이점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벌려놓은 여러 사업체가 있어 딸 하나만 재산과 함께 유럽으로 도피시키나 그 딸 마저도 동로마의 멸망이
재상의 반역에 의한 것이란 생각을 갖은 사람에 의해 살해된다.

반역자가
거만의 재산을 가졌거나 따르는 무리가 많으면 통 크게 도와준 공로는 물거품이 되어 반역자 패거리 함께 처형하는 것은 정복자의 후발
정치공식이었다.노타리스가
재상 시절에 우르반이란 헝가리 무기 제조 기술자가 궁전에 찾아와 자기가 개발한 대포는 Constantinople성의 삼중성벽을 파괴 할 수
있다며 신 발명품 사줄 것을 제의하나 재상과 관료들은 우르반의 설명조차 듣지 않고 비웃음으로 문전박대 했다.

 신무기
개발로 상대국의 신경을 건드리면 전쟁 발발로 이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궁전에서 쫓겨나 여관에서 무의 도식하는 무기 발명자 예기가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 귀에 들어가자 즉시 사람을 보내 수도 아드리아노플리 술탄의 궁전으로 불러 들렸다.

설계도를 한
아름 안고 들어온 우르반의 예기에 귀를 기울이던 술탄은 무기 기술자가 요구하는 금액의 3배를 제의했다. 길이 8메타 포탄 무게만600키로에
30마리의 소가 끌고 갈 수 있는 대포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우르반은 술탄을 시간 제한, 예고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우르반이 만든 8 대의 대포가 Constantinople성 함락의 일등공신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 젊은 술탄은 콘스탄티노플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다. Constantinople에서 북쪽 300키로 지점의
유목민족 투르크 족의 수도 아드리아노플리는 전쟁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술탄 메메드
2세는 21세 약관의 젊은이로 냉혹한 전략가였다. 전략이란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는 최고의 심리 기술로 젊은 술탄은 사람의
심리에 정통했다. 어떤 편견에도 사로 잡히지 않고 조용하며 열정적인 성품이나 결단성에 있어 한번 결심하면 대담한 방법으로 이루어내는 자질의
소유자였다.

 

부친 술탄
무라드와 노예출신 어머니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나 두 형들이 사고로 죽자 중신들의 농간으로 술탄의 눈 밖으로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니사에서
칩거 중에 부왕의 죽음을 사흘 만에 알았다. 소식을 접하자 왕궁에서 사신들이 올 것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말을 타고 “나를 따를자 오라” 이
말만 던지고 수도로 전력 질주하여 1451년 2.18일 나이19살로 술탄이 되었다. 즉위하는 날 경쟁상대인 이복동생은 욕조에서 죽어 투르크
제국의 즉위직후 동생살해의 관습이 되었다. 농간하던 중신들은 2년 후Constantinople성이 함락되고 한 달 후 적과 내통한 죄로 처형시킨
대단히 정략적 인물이었다.

 

역사는 가정할 수
없지만 똑 같은 조건에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와 뒤바꾸었다면 결코 투르크 족은 Constantinople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지도자
한사람의 자질이 국가의 운명을 바꾼다고 할 수 있게 중요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전성기에는 인구가 100만이 넘었으나 전쟁의 소문으로 상류층들은 거의 국외로 빠져나가 주민은 삼만 오천명 정도였고 병사들은 용병 포함
7.500명이었다. Constantinople황제는
투르크의 침략을 예감하여 유럽에 지원병을 요청하나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대결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군주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대성당
수도사들이 보낸 “이단의 도움을 받기보다 이슬람의 통치를 받겠다”는 교리분쟁의 편지질에 이견이 생겼다.

서기1453.
4월 2일. 21세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서유럽 국가들이 아무도 콘스탄티노플을 돕지 않는다는 정보를 최종 점검하고 친위대 예니첼리 군단
일만오천명을 포함. 총16만 군대를 이끌고 거포 8대를 수백 마리의 소에 끌려 동 로마의 수도 Constantinople로 진격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연방 사신을 술탄에게 보네 연공금을 받치겠다는 조건으로 평화 회담을 요청하나 대답은 한결 같은 제위에서 물러나고 나라를 바친다면 백성들은
살려준다는 대답뿐이었다. 상호불가침조약이나 평화회담은 방위체제 기능이 작동할 때만 지켜지는 것으로 사실상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Constantinople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민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라 전쟁을 선포하나 심중으로는 난공불락의 삼중성벽을 믿었다. 1453년
4.12일 어미 곰이라는 별명의 대포 탄환이 성벽에 부딪쳐 파괴되는 성벽을 보자 믿음은 흔들린다. 투르크의 용병들이 성벽을 향해 공격하자
정규병들은 용병들의 뒤에서 조금이라도 후퇴하는 병사의 목을 사정없이 베였다. 백병전이 벌어졌다.
일진일퇴가 50일 동안 반복됐다. 동로마Constantinople성의 병사들은 모두 열심히 싸웠다.

 

황제 자신도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들을 칼로 후려치면 분전하나 성당과 왕궁 창고에 쌓여있는 보화로 용병들을 모집하는 작업은 하지 않고 서유럽 군주들이 자기의 얼굴을 보고
구원병을 보낼 것이라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이
항구도시에는 제노바 인들과 베네치아 인들이 상권을 다투고 있었다. 제노바 인들은 다혈질로 성격이 급하나 머리 회전은 항상 베네치아 인들보다 한발
늦었다. 제노바 거류인 행정관 로멜리노는 제노바인의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전쟁에서 투르크 병사들이 제노바
인들만 선별해 놔둘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베네치아인
선장 코코는 용맹한 사람으로 소수의 정예로 금강만 외각의 투르크 함대를 야습하여 화공으로 불태우자는 계획을 작전회의에 내놓아 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말이 제노바 인들에게 전해 졌다. 제노바 인들은 우리가 빠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라며 황제를 찾아와 항의하자 할 수없이
공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후 배를 준비하지 못한다고 연락해와 3일 후로 기습작전을 미루었는데 제노바인중에 누군가 내통하는 자가 적에
연락했다. 삼일 후 야습공격을 감행해 전진에 들어가자 대비하고 있던 적군들은 이들을 생포하여 해변 가에서 40명의 목을 베였다. 이후부터
베네치아 인들은 제노바 인들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투르크 술탄은
병사들에게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이성이 함락되면 3 일간 약탈을 허락한다고 말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투르크 병사들은 지하에 갱도를 파
성벽 밑을 폭파시키려고도 했다. 전쟁의 양상에서 Constantinople성의 주민들은 성을 지켜지기가 어렵다는 소문이 돌며 점점 말이
없어졌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어 성소피아 대성당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항상 가득 찼다. 그러나 천 사장 미가엘이 나타나 이슬람교도들을
마르마라 해로 몰아내는 이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Constantinople
최후의 날 .제노비아인
용병 대장 주스티니아니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용병1.500명을 데리고 용감하게 싸웠다. 황제는 이들의 전투능력을 높이 사 가장 중요한 성벽에
이들을 배치했다. 술탄도 정예 예니체리
군단 일만 오천명을 최종 투입했다.  메소타카온 성벽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날아온 화살하나가 주스티니아니의 왼편 목에 명중했다. 이어 오른쪽
허벅지에 다시 화살이 꽂혔다.
 내 성벽으로
통하는 문과 시내로 통하는 문이 남김없이 잠겨 있었고 열쇠는 황제가 가지고 있었다. 부하 한명이 황제를 찾아가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가 부상당해
위급한 것을 알렸다. 외 성벽과 방책사이의 통로를 달려온 황제는 그 손을 잡고 그곳에 머무르기를 청하나 부상자는 전선에서 물러나기만 요구하며
황제의 간청도 듣지 않았다. 황제는 할 수없이 열쇠를 내줘 용병대장은 부하 등에 업혀 금각만의 배로 호송되었다. 용병들은 이기는 싸움에는
용감하지만 패색이 보이면 도주도 빠르다. 후방으로 실려 가는 대장을 본 순간 이제 전투는 끝장나버렸다는 생각에 공포가 출구로 미려 닥쳤다. 성벽
안에 일어난 소동을 술탄이 알아차렸다. 

술탄은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도시는 우리 것이다”. 밀리던 예니체리 군단 병사들은 하나가 되어 사기충천해 졌다. 동로마 제국의 깃발이 내려지고 가장
높은 탑에 투르크 국기가 올라갔다. 이 순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일세를 풍미한 영웅이 되고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모든 것이 끝나
단신으로 적병들 속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죽었다.  1453.년 5월29일 이었다.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는 퇴각하여 도망치는 배에 올라 지중해로 나가지만 상처보다 부하들의 눈초리를 받을 수 없어 괴로워하며 삼일 만에 죽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최후라 생각하면 죽음이라도 과감히 받아 드려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구차하게 처신하면 혹 살아남아도 스스로 명예를 상실한 산송장으로 살
수 밖에 없어 죽을 때 라면 과감하게 죽음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Constantinople성은
지옥의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시민들 모두 제노아 인이나, 베네치아 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누구나 남녀노소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당했다. 성소피아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수녀들은 노예로 끌려가고 얼굴이 반반하면 즉시 겁탈 당했다.  약속한 삼일이
지나자 술탄은 Constantinople성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수도로 정하고 이름은 이스탄불이라 명한다.
5 세기 뒤
1930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로 공식허가 되었다.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전쟁들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병력이 많아서도 아니요. 무기가
우수하다고 꼭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투정신이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휘자의 자질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알렉산더는 다리오
왕의 병력 오분의 일로 페르시아 대군을 패배시켰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용사 300으로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페르시아100만 대군을
상대했다. 나중 토착민 배신자 에피알테스가 거액의 보상금으로 사이 길을 가르쳐주는 바람에 전원 옥사하고 말지만 진군하는 페르시아 대군을 제지하여
우군에게 시간 벌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성서에 나오는
기드온이라는 믿음의 사람은 용사 300명으로 삼만 명의 미디안 적군을 몰살했다.

 전쟁의 승리는
병사 숫자나 무기가 아니라 지도자의 자질과 전략으로 승부가 결정 난다고 역사는
말한다.

http://blog.donga.com/spacetec2007/archive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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